《필요의 탄생》 저자 헬렌 피빗 - 냉장고에서 발견한 20세기의 삶

냉장고에서 발견한 20세기의 삶
《필요의 탄생》 저자 헬렌 피빗


삶의 방식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달라진다. 개인의 철학, 사회의 구조, 그리고 기술의 발전까지 인간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20세기는 첨단 기술이 대중을 향한 시대였다. 기술은 사람의 삶을, 그리고 가치관을 뒤흔들어 놓았다. 대단한 기계 장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냉장고나 라디오,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 얘기다. 영국 런던과학박물관의 소비자 가전 큐레이터로 오랜 세월 일해 온 헬렌 피빗은 냉장고야말로 가족의 ‘애착’이 깃든 기계라고 이야기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발견한 20세기의 삶을, 《필요의 탄생》의 저자 헬렌 피빗에게 직접 들어봤다.

냉장고는 가족의 삶을 변화시켰다.

냉장고는 가정 내에서 음식에 대한 접근 방식을 변화시켰다. 초기 냉장고는 주부나 하인의 전유물이었으며, 일부 냉장고에는 잠금장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 구성원 누구든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일종의 민주화라고 본다.

그래서 가족이 한데 모일 ‘식사’라는 구실도 흐릿해졌다.

냉장고가 단절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영국에서는 가족의 저녁 식사가 줄어들었다. 냉장고 사용이 중요한 원인이다.

하지만 냉장고 덕분에 우리가 더 나은 영양을 섭취하고 있지 않나?

냉장고 덕분에 신선한 음식을 더 많이 먹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공식품 또한 많이 소비하게 되었다. ‘더 나은’ 음식의 정의란 무엇일까. 냉장고와 저온 유통망이 등장한 덕분에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온 농산물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제철이 아닌 농산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것이 더 나은 음식, 더 나은 식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는 역사를 통틀어 ‘잘 먹고자’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있다.

‘욕망’이라는 단어에 관해 잘 생각해 보자. 욕망은 곧 이상과 연결된다. 냉장고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냉장고를 구매했던 사람들은 단순히 음식을 보관하는 기계에 돈을 지불한 것이 아니었다. 냉장고가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와 생활 방식에 돈을 쓴 것이다. 우리는 냉장고에 건강한 음식을 저장하지만, 결국 잊어버렸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도 생긴다. 그저 음식을 냉장고에 넣는 것만으로도 잘 먹고자 하는 욕망이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초기 냉장고를 구매한 사람들은 어떤 욕망을 품고 있었나?

1920년대 판매자들은 냉장고를 매우 이상적인 생활을 상징하는 제품으로 묘사했다. 당시 광고를 보면 세련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냉장고 앞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장면이나, 하인들이 멋지고 차가운 디저트를 서빙하는 장면 등을 담고 있다. 냉장고는 그 시절 자동차만큼 비쌌으며, 상류층 소비자들은 이를 통해 하인 없이도 스스로 요리를 할 수 있는 품위 있는 방법을 찾았다. 초창기 냉장고는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니었다.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제품이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냉장고가 저렴해지고 대중화하면서, 그 가치는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냉장고는 이제 쉽게 버려질 수 있는 물건이다. 더불어 최신식 냉장고는 과거보다 수명이 짧고, 쉽게 수리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과거에는 달랐나?
오랜 시간 동안 냉장고는 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초기 모델들은 전반적으로 훌륭하게 설계되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냉장고는 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깊은 애착을 남기게 되었다. 냉장고마다 각각의 개성이 있다. 냉장고가 집안에서 내는 윙윙거리는 소리는 우리 삶의 이야기가 담긴 배경 소음이다. 메모나 가족사진, 쇼핑 목록 등 일상을 기억하기 위한 게시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과 추억을 담게 되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 수천 대의 가전제품을 기증받았다. 하지만 그중 사람들이 애정을 갖고 이름까지 붙여가며 아끼는 물건은 많지 않다. 냉장고가 바로 그런 물건이다.

냉장고는 실질적으로 무엇을 바꾸었나?

냉장고는 ‘신선함’의 정의를 바꾸었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시대에는 첨가물이 가득한 우유를 ‘신선한’ 우유로 여기며 마셨다. 오늘날 ‘신선한(fresh)’ 식품이라고 하면, 가공하지 않은 식품을 의미한다. 냉장고 덕분에 우리는 전 세계의 식재료를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계절 농산물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로 인해 탄소 발자국이 늘어났지만, 깊은 영감을 주는 퓨전 요리가 등장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 철학부터 삶까지 모든 것을 바꾼 셈이다.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술은 편리함, 익숙함, 실용성, 신기함, 접근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없이는 못 살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물론, 많은 기술이 그저 현대판 ‘잡동사니’로 전락하기도 한다.

냉장고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와 비교하면 우리의 식습관도 많이 바뀌었다. 냉장고도 변화할까?

물론이다. 냉장고는 사회적 변화를 따라 함께 변화해 왔다. 다만, 우리는 냉장고에 보관할 필요가 없는 것들까지 냉장고에 넣곤 한다. 기후 위기의 시대, 이러한 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다. 미래의 냉장고는 에너지 절약에 관한 다양한 방식을 수용해 변화할 수 있다.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하고 최근에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도입도 코앞으로 닥쳤다. 사람들은 이제 요리를 하지 않게 될까?

간단히 답하겠다. “NO!”


김혜림 에디터

* 2024년 9월 25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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