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당보다 급한 것

2024년 6월 3일, explained

지구당 부활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다. 지역 정당이다.

2019년 9월 9일 미국 버몬트 진보당 당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 버몬트 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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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국회가 5월 30일 시작됐다. 국회가 열리자마자 여야는 지구당 부활을 외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구당 부활을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지구당 부활을 “정치 개혁”이라고 했다. 양당은 정당 운영에 당원의 목소리를 더 반영하기 위해, 기득권과 정치 신인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지구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WHY NOW

지구당 부활에 반대하는 쪽은 지역 유지와 정치권의 유착, 금권 선거의 폐해가 발생해 정치가 퇴보한다고 주장한다. 찬성하는 쪽은 선거구별로 촘촘하게 민심을 들을 수 있고, 지역 정치 활성화를 통해 정치 신인이 정치권에 진입하는 장벽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역 정치 강화가 지구당 부활의 목적이라면 더 시급한 것이 있다. 바로 지역 정당이다.

지구당

지구당은 정당의 지역 조직이다. 2004년까지 존재했다.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1개씩 뒀다. 지구당 위원장은 보통 그 지역구의 현역 국회의원이나 낙선해 재기를 노리는 인사가 맡았다. 지구당 사무실에는 사무국장, 조직부장, 여성부장, 청년부장, 행정 직원이 상주했다. 이들의 월급, 사무실 임차료, 활동비를 합하면 월 1000~2000만 원이 들었다. 중앙당에서 매달 몇백만 원씩 보내 줬고, 모자란 금액은 각 지구당이 후원금을 받아 해결했다. 그러다 보니 지구당 위원장에게 정치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시·도의원 공천을 받기도 했다. 지구당은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설립 취지가 무색하게 지구당 위원장의 사조직으로 변질했고 금권 정치의 온상이 됐다.

차떼기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 이회창 대선 후보 캠프는 서울 만남의광장 휴게소에서 LG그룹으로부터 현금 150억 원이 실린 트럭을 통째로 건네받았다.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다. 이런 식으로 불법 모금한 대선 자금 중 360억 원을 지구당으로 내려보냈다. 부산 같은 전략 지역에는 지구당별로 2억 원씩 보냈다. 이 ‘실탄’은 지구당 위원장→동별 책임자→투표소별 책임자→유권자 순서로 하향식으로 뿌려졌다. 대선 불법 자금 수사가 진행되면서 지구당이 불법 자금 수수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왔고 2004년 법적으로 금지된다. 당시 법 개정(정치자금법, 정당법, 공직선거법)을 주도한 인물이 한나라당 초선 의원 오세훈이었다. 그래서 ‘오세훈법’이라 불린다.

당원협의회

지구당 폐지 이후 당원 관리가 어려워지자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 당원협의회(당협)다. 그런데 당협은 정당법상 사무실을 둘 수 없고 유급 직원도 고용할 수 없다. 선거에서 낙선한 원외 당협위원장은 당원과 유권자를 만날 거점이 없다. 현역 의원과 달리 정치 후원금도 선거 기간에만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전직을 살려 자비로 변호사 사무실 같은 걸 차려 놓고 조직을 관리한다. 반면 현역 국회의원은 지역구에 국회의원 지역 사무소를 설치해 사실상 지구당처럼 운영한다. 사무소 운영비는 상시 받을 수 있는 정치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국가에서 급여를 받는 보좌 직원 중 일부를 지역 사무소에 배치한다. 현 당협 제도는 현역 의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포석

여야 지도부는 차떼기 이후 20여 년이 지났고 우리 정치 풍토도 그동안 많이 나아졌으니, 지역 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지구당을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속내는 달라 보인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차기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설 것이 사실상 확정적이다. 박빙 승부에서 승리하려면 지난 총선에서 낙선자가 많았던 부산, 경남 같은 전략 지역에서 표를 더 모아야 한다. 지구당이 있으면 원외 인사들이 미리 표 관리를 할 수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대위원장은 오는 7월 전당 대회에 출마할 전망이다. 국민의힘은 지난 총선에서 108석에 그쳤다. 즉, 원내보다 원외에 있는 인사가 더 많다. 지구당 부활 공약으로 원외 당협위원장의 표심을 얻으면 손쉽게 당 대표가 될 수 있다.

정당법

그런데 지구당이 지역 정치 강화의 유일한 해법일까. 달라진 정치 환경을 고려할 때 지구당 부활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지역 정치를 키우려면 지구당 부활보다 더 시급한 게 있다. 지역 정당(local party)이다. 현행 정당법은 수도에 중앙당을 두고 5개 이상 시·도당을 둘 경우에만 정당 설립을 허용한다. 예를 들어 제주도 주민들이 모여 제주도를 거점으로 하고 제주도에 맞는 정책을 추진할 지역 정당을 만들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거대 양당 또는 그보다 작지만 그래도 전국 정당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규모를 갖춘 제3지대 정당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중앙 정치

현행 정당법은 서울 중심 정치를 심화한다. 여기서 서울은 지자체로서의 서울이 아니라 중앙 정치의 상징으로서의 서울이다. 중앙 정치에 예속된 지방 정치의 폐해는 지방 선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방 의원 선거는 후보자 이름도 공약도 모르고 비례대표 투표처럼 당을 보고 찍는다. 2년 뒤 지방 선거도 비슷하게 전개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싫으면 기호 1번 구의원을 찍고, 이재명 대표가 싫으면 기호 2번 군의원을 찍는다. 지방 선거가 중앙 정치의 대리전이 된다. 시장, 도지사는 다음 대선을 위한 발판이 필요한 인물이 출마해 당선된다. 거쳐 가는 자리라 임기 중에라도 더 좋은 기회가 생기면 자리를 옮긴다.

로컬 정치

로컬의 시대다. 정치도 예외가 아니다. 지방 분권이 확대되고 있다. 정부 부처는 진작에 세종시로 옮겼고, 국회 완전 이전까지 논의되고 있다. 이미 1개의 특별자치시(세종)와 3개의 특별자치도(강원, 전북, 제주)를 운영하고 있다. 지방 분권, 지역 다극화, 균형 발전이 시대정신인 상황에서 중앙당의 소재지를 수도로 제한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다. 정당법에서 중앙당의 수도 소재 규정과 5개 이상의 시·도당을 갖도록 한 조항을 삭제하거나, 아니면 정당 설립 규정을 이원화해 지방 선거에서만이라도 지역 정당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IT MATTERS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에 출마했던 버니 샌더스 상원 의원은 공식적으로 무소속이다. 그러나 버몬트 진보당과 연대하고 있다. 버몬트 진보당은 버몬트주에서만 활동하는 지역 정당이다. 주의회 상·하원에서 6석, 버몬트주 최대 도시인 벌링턴 시의회에서 4석을 차지하고 있다. 버니 샌더스와의 연대를 통해 연방 상원에도 1석을 갖고 있다. 부주지사와 시장도 배출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일본 등 많은 나라에서 지역별로 다양한 지역 정당이 활동하며 지역 현실에 맞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불가능하다. 지구당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역 정당이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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