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엔 지폐의 얼굴

2024년 7월 5일, explained

일본 경제가 신권에 장래 희망을 담았다.

일본 1만 엔 신권 샘플. 사진: Gerard Bottino via Getty Images
NOW THIS

일본에 새로운 지폐가 등장했다. 1만 엔, 5000엔, 1000엔짜리 지폐의 얼굴이 바뀐 것이다. 위조지폐를 막기 위한 신기술 도입이 가장 큰 이유다. 현금 사용률이 60퍼센트가 넘는 일본의 특성상, 지폐 관리를 위해 20년 안팎 주기로 지폐를 교체해 왔던 관례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다. 1만 엔권의 새 얼굴인 ‘시부사와 에이이치’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경제 침탈을 주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WHY NOW

지폐는 원래 상징 덩어리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알지 못하는 외계인에게 5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며 이것이 백반 정식 5인분 값어치라 설명한들 이해할 리가 없다. 시장 전체를 관통하는 규율과 그 규율을 지켜내는 힘을 신뢰할 수 있어야 종이 한 장이 몇 끼니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지폐에는 그 지폐를 발행하는 주체가 고심하여 선정한 상징이 담긴다. 신권 발행을 통해 일본은 모험과 변화, 성장을 선언했다.

지폐를 없애기 위한 지폐

이번 신권 발행에 일본 정부는 이례적인 목표를 하나 더 담았다. 바로 ‘무현금 결제’를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자판기의 천국 일본에서는 지폐를 기계에 넣어 인식시켜야 결제가 가능한 곳이 많다. 팬데믹 이후 늘어난 디지털 키오스크 얘기가 아니다. 마치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먹듯, 동네 라멘집에 가도 자판기에서 식권을 뽑아 직원에게 제출하는 방식이 흔하다. 신권을 발행하게 되면 이 기계를 업그레이드하거나 교체해야 한다. 새로운 지폐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비용이 꽤 든다. 100만~200만 엔 정도다. 아예 이번 기회에 스마트폰으로 결제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바꾸라는 것이다. 일본의 무현금 결재 비율은 2022년 기준 36퍼센트 수준이다. 한국은 2021년 기준 가계 지출액 중 현금 비율이 22퍼센트에 그쳤다.

퀀텀 점프, 재팬

일본은 아직도 도장 없이는 결재가 진행되지 않고, 공무원은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한다. 90년대의 일본은 최첨단이었을지 모르지만, 2020년대의 일본은 아직 20세기에 갇혀있다. 과거에 잠긴 일본 경제에 최근 변화가 보인다. 반도체 르네상스를 꿈꾸는가 하면, 두각을 드러내는 스타트업도 등장하고 있다. 일본은 21세기로의 퀀텀 점프를 노리고 있다. 신용카드 시대는 건너뛰고 핀테크 시대로의 점프를 노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 야망이 이번 신권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신권의 얼굴들을 살펴보면 자명해진다. 모두 1800년대 중반에 태어나 1900년대 초중반에 사망한, 일본이 전근대에서 현대로 퀀텀 점프를 시도하던 시기의 인물들이다.

새로운 지폐의 주인공들

먼저 1000엔권에는 일본 근대 의학의 기초를 다진 ‘기타자토 시바사부로’의 얼굴이 들어갔다. 페스트균을 발견하고 파상풍 치료법을 개발한 인물이다. 5000엔권의 얼굴은 ‘쓰다 우메코’다. 일본의 첫 여성 유학생으로 여섯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열일곱 살에 귀국한 후 여성의 자립을 목표로 교육 분야에 투신했다. 마지막으로 1만엔 권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초상화가 들어갔다. 일본 최초의 벤처 투자가다. 동시에 일본 자본주의의 설계자다.

일본 최초의 벤처 투자가

시부사와는 일본 최초의 근대 은행인 제일국립은행의 총감을 맡았다. 일본의 현대 자본주의를 시작한 셈이다. 오사카방적회사, 오지제지, 시미즈건설, 도쿄전력, 도쿄가스, 제국호텔, 도쿄제철 등의 기업은 물론이고 도쿄 상법회의소, 도쿄 증권거래소 등 경제 조직 설립에도 간여했다. 전부 합하면 500여 곳에 달한다. 그러나 시부사와는 그 기업과 조직을 사유화하지 않았다. 재벌 기업으로 묶어내지도 않았다. 기업을 설립한 이후에는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또 다른 기업 설립에 돌입했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벤처 창업자, 혹은 벤처 투자자 같은 행보다.

망국의 공무원

시부사와는 어떻게 멈추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일종의 신념 때문이었다. 시부사와의 집안은 에도시대 말 호농층이었다. 쉽게 말해 ‘상업적 농업경영자 집안’이다. 고만고만한 농촌에서는 꽤 잘 살았다는 얘기다. 돈이 있는 집안이었으니 공부도 꽤 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에도 막부의 공무원이 되었다. 당시로는 벼락출세다. 그러나 시부사와는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출장 중 막부의 멸망 소식을 듣게 된다. 메이지 유신으로 졸지에 망국의 공무원이 된 것이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대장성 재무 담당으로 발탁되지만, 4년도 되지 않아 실업계에 투신한다. 공무원으로 아무리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도 제대로 된 기업이 없으니, 경제가 살지 않는다. 그러니 직접 창업에 뛰어들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시부사와의 죄명

사직서와 함께 정부에 제출한 의견서에는 타이완 침략을 멈추고 그 돈을, 민생을 위해 써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와 경제가 소용돌이치며 변화하는 한가운데서, 그가 내린 결론은 당시 메이지 정부가 추진하던 해외 팽창의 야욕, 즉 ‘강병’이 아니라 ‘부국’이었기 때문이다. 시부사와는 《논어》를 경영인의 필독서로 꼽으며 공익을 최우선으로 두는 ‘도덕 경영’을 강조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한반도 경제 침탈의 주범으로 꼽힌다. 죄목은 무엇일까.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이토가 저지른 15개 죄악 중 하나로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를 꼽았다. 제일국립은행을 세워 한반도로 진출시킨 인물이 바로 시부사와다. 한국전력의 전신이 되는 경성전기 또한 시부사와가 사장을 역임했다.

일본 신권의 시대정신

시부사와 에이치로는 시대의 물결에 맞춰 현대 일본 경제의 청사진을 그린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 밖으로 사고의 틀을 확장해 의심하고 판단할 줄 아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타이완 침공을 반대했던 이유도 침공의 부당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본의 민생을 챙겨야 한다는 논리다. 일본의 신권은 그 시대를 영광스러웠던, 기회와 발전의 시대로 인식하는 일본 금융 당국의 시각을 반영한다. 제국주의 침탈과 전쟁으로 치달았던 시대정신의 빈궁함은 논외로 두고, 전환기의 혁신에만 주목하고 있다.

IT MATTERS

1903년 오사카에서 큰 박람회가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 기이한 전시가 등장한다. ‘학술 인류관’에서 타이완 선주민, 아이누인, 터키인 등과 함께 조선인 2명이 전시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체적 특징이 서양인과 다른 선주민을 ‘전시’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과학도 학문이 아니라 정복의 도구로 전락했던 시대를, 일본은 아직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다만, 이러한 문제 의식과는 별개로, 우리나라의 지폐에는 어떤 상징이 숨어있을까 들여다보게 된다. 지폐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시대의 인물인 동시에 유교적 가치를 실현했다. 사상가로서, 정치가로서, 현모양처이자 예술가로서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의 유산이 2024년 우리 지폐에 어울리는지는 의견이 갈릴지도 모르겠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