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재난, 폭염

2024년 6월 19일, explained

소리 없는 재난의 시대다.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2024년 6월 4일,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전광판에 기온이 표기돼 있다. 사진: Justin Sullivan/Getty Images
NOW THIS

수십 개의 환경, 노동, 의료 단체가 미국 연방 재난 관리청(FEMA)에 폭염과 산불 연기를 홍수, 토네이도와 같은 중대 재난으로 선포하도록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연방 정부가 기후 위기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주와 지역 사회를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청원서가 받아들여지면 냉각 센터, 공기 여과 시스템을 설치할 수 있는 기금을 확보할 수 있다.

WHY  NOW

여름의 초입이다. 초입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게, 오늘 서울은 35도까지 기온이 오를 전망이다. 누군가에게 기후 위기 시대의 폭염은 휘몰아치는 재난이고,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다. 더 이상 재난은 폭풍처럼, 지진처럼 시끄럽지 않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기금

미국은 허리케인과 폭풍 등에 대비하여 긴급 대피소, 주택 수리, 장기 재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재난 기금 대응을 운용하고 있다. 재난이 상시화하면서 27조 원 규모인 재난 기금은 한 해가 다 끝나기 전인 8월 고갈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재난 관련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의회에 의견을 냈다. 미국의 대중 과학 매체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카‘는 바이든의 요청이 의회에서 받아들여지더라도 재난 기금이 고갈되는 것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120억 달러의 예산은 8월에 모두 바닥나 2400개 피해 복구 사업에 대한 자금 지원이 중단됐다.

청원서

기금 운용의 청사진이 되는 스태포드 법(Stafford  Act)은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처리하고 포괄적인 재난 계획을 세우기 위해 1988년 제정됐다. 2017년 미국을 휩쓸었던 허리케인 하비 이후, 스태포드 법과 연방 재난 관리청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었다. 그들이 장기적 해결책 대신 단기적 해결에 가까운 주택 지원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로부터 7년 후, 미국 전역은 폭염과 산불로 몸살을 앓고 있다. 생물 다양성 센터, 건강한 환경을 위한 간호사 연합, 플로리다 농장 노동자 협회를 비롯한 31개 단체가 청원서를 냈다. 스태포드 법의 보호 범위에 폭염과 산불을 포함하라는 내용이다. 청원에 참여한 노동 그룹은 에어컨 없이 일하는 수천만 명의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생명 다양성 센터는 산불 연기로 인한 생물 종 손실을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위라는 문제

2022년 FEMA는 10일간 395명이 사망하고 전력망을 위기로 몰아넣은 캘리포니아 폭염을 대규모 재해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계절이나 일반적인 대기 조건이 아닌 개별적인 사건과 영향을 평가하는 것이 기조”라는 이유였다. 즉 매캐한 연기와 더운 여름은 아직 재난이 아니다. 현실은 다르다. 국립 기상청에 따르면 이미 미국에서는 허리케인과 홍수, 토네이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폭염으로 인해 사망하고 있다. 1980년에는 폭염으로 1250명 이상이 사망했고, 2003년 8월 유럽에서는 약 5만 명의 목숨이 끊어졌다.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만큼 심각한 것은 폭염에 ‘위험하게 노출된’ 이들도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2023년 기준, 미국 내 노숙자는 65만여 명으로 전년도보다 12퍼센트, 약 7만 명이 늘었다. 폭등한 집값과 이민자 증가가 주요 원인이다. 인플레이션과 국제 정세도 폭염의 힘을 더하는 상황이다.

경제적 피해

나무가 뽑히는 허리케인과 건물이 무너지는 지진처럼, 폭염과 산불 연기도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이어진다. ‘사이언스 어드밴스’지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2008년에서 2018년 산불이 일으킨 미세먼지 오염으로 인해 약 597조 원에서 630조 원의 경제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폭염으로 인한 만성적 신체 위험이 2100년까지 GDP를 최대 17.6퍼센트까지 위축할 수 있으리라 추정했다. 게다가 가난과 폭염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포틀랜드주립대학교 비벡 샨다스 교수가 측정한 바에 따르면 콘크리트로 덮인 포틀랜드의 빈민가인 렌츠의 기온은 51도였다. 평균 집값이 약 100만 달러인 교외의 한 도시는 같은 시기 37.2도를 기록했다.

재난 규정과 폭염

재난 기금은 다수의 도움이 없다면 회복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폭염과 산불 연기는 왜 그런 안전장치를 부여받지 못했을까. 폭염은 기존의 재난 규정 아래에서 피해 규모를 정확히 산정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기금은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공공 인프라가 얼마나 손상됐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해당 재해로 인해 사망했는지에 따라 재난을 선포한다. 폭염의 경우 인프라 피해가 주된 위험 요소가 아니며 사망 진단서도 열 그 자체를 사망의 원인으로 산정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전 세계 폭염 문제에 초점을 맞춘 비영리 단체인 ‘모두를 위한 기후 회복력(Climate Resilience for All)’의 최고 경영자 캐시 보우먼 맥레오드는 “전 세계의 어떤 기관, 도구, 데이터세트도 지역 사회의 폭염에 대응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시스템

문제는 시스템이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FEMA의 행정관이었던 브록 롱은 주요 재난 목록에 새로운 항목을 그저 추가하는 것은 “낡은 녹슨 자전거 프레임에 새로운 부품을 묶는 일”이라 표현했다. 대형 인프라 소유자, 사회 지도자와 함께 합리적인 재난 측정 시스템을 재설계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는 의미다. 폭염과 산불 연기처럼, 기후 위기 시대의 재난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더위 속에서 감춰진 노숙자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경계 없이 퍼져 나가는 산불 먼지로 인해 도시 바깥의 사람들은 터전을 잃는다.

방법

논의되는 해결 방법은 다음과 같다. 폭염을 비롯해 사람을 중심으로 손해를 끼치는 재난에 대해 정의하고, 지역별 시나리오를 철저하게 구축한다. 관련한 재난이 인프라에 끼치는 계단식 영향을 예측하고 보강한다. 녹색 시설을 확장해 콘크리트의 면적을 줄이는 것도 방법의 하나다. 물론 이러한 구체적인 대책과 함께 논의돼야 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소리 없이 찾아오는 기후 재난을 수면 위로 올리는 일이다. 기후 재난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도달하지도, 거대한 사건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과거의 재난이 부서진 건물로, 부러진 나무로 모습을 드러냈다면 지금의 재난은 흐릿한 아지랑이로, 뉴스에서 주목하지 않는 이들의 죽음으로 드러난다. 기후 위기 시대의 안전장치는 이곳을 향해야 한다.

IT MATTERS

조용한 재난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으로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더위와 산불 연기의 입자에 명확한 임곗값을 설정하고, 그 범위를 설정하는 식이다. 해당 임곗값에 지역과 산업별의 차등을 두는 식으로 사각지대를 최소화할 수 있다. 기후 위기는 우리의 뇌를, 생각하는 회로를, 다양한 정책을 바꿨다. 그 변화만큼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재난에 대한 정의도 바뀔 필요가 있다. FEMA를 비롯한 전 세계의 시스템은 재난을 눈에 보이는 사건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기후 위기가 조용히 찾아왔듯, 기후 위기 시대의 재난 역시 조용히 삶에 침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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