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기운다

2024년 6월 11일, explained

유럽 의회 선거가 끝났다. 극우 세력이 약진했다.

2024년 6월 9일 프랑스 파리의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수백 명의 좌파 시위대가 유럽 의회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한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 Luc Auffret/Anadolu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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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의회 선거 결과의 윤곽이 드러났다. 극우 정당이 약진했지만, 우려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 연합의 두 강대국, 프랑스와 독일 정치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유럽 연합의 수장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연임 또한 불투명해졌다. 유럽이 느리지만 천천히,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다.

WHY NOW

유럽 연합은 개인 정보 보호, 독과점 규제, 인권과 환경에 대한 진보적 가치 등을 강조해 왔다. 자동차를 만들어도, AI를 개발해도 유럽 시장을 패싱할 생각이 아니라면 유럽 연합의 정책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유럽의 정책은 전 세계에 자연스레 영향을 미친다. 그런 유럽 의회의 구성이 바뀐다. 우리가 지향해온 미래의 방향이 바뀔지도 모른다.

유럽 연합의 권력 구조

의회는 입법부다. 국민의 대표가 모여 법을 만든다. 그러나 유럽 연합은 국가가 아니다. 정책이 결정되는 구조가 조금 다르다. 먼저, 유럽 연합 정상회의에서 방침을 결정하면, 행정부에 해당하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서 법안을 발의한다. 이렇게 발의된 법안은 각 회원국의 국익을 대표하는 각료 이사회와 유럽 의회에서 심의된다. 이때 의회가 법안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 즉,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을 수장으로 하는 행정부가 법안을 직접 발의하고, 이를 국회에서 심의 및 처리하는 ‘정부 입법’ 형식에 가깝다.

유럽 의회의 힘

법률안 발의권도 없는 의회라니, 역할이 작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유럽 의회는 돈과 권력을 모두 아우르는 힘을 갖고 있다. 유럽연합 예산 심의권과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선출권이다. 집행위원회가 우리나라의 행정부에 해당하니, 집행위원장은 우리나라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현재 집행위원장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소속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이다.

유럽의 대통령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메르켈 총리 시절, 가족여성청년부와 노동부 장관을 거쳐 독일 첫 여성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의사 출신의 정치인이다. 동시에 7남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소속 정당인 CDU는 중도 우파로 분류되지만, 폰데어라이엔은 개혁파로 분류된다. 노동부 장관 재임 당시 당내 반발에도 남성의 2개월 육아휴직 제도를 관철했고, 동성 결혼에도 찬성 입장이다. 2019년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그린 딜(Green Deal)’을 비롯한 각종 탄소 규제 정책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추진했다.

패배하지 않았지만, 이기지 못한

이런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연임에 빨간불이 켜졌다. 위원장 선출을 위해서는 유럽 연합 정상 회의의 지지를 받은 후 의회의 인준을 거쳐야 한다. 2019년 당선 당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을 지지했던 것은 중도인 유럽인민당(EPP, 중도우파), 리뉴(RE, 중도좌파), 사회민주진보동맹(S&D, 중도좌파)였다. EPP는 이번 선거에서 승리했다. 184석을 확보할 전망이다. 전체 의석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그러나 RE는 참패했고 S&D는 겨우 현상 유지에 성공했다. 과반을 넘길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즉, 이번 의회 선거 결과로 유럽 연합의 행정 수반이 바뀔 가능성이 생겼다.

조금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다. 이번 선거의 승리자로 꼽힌다. 멜로니 총리의 정당인 극우 성향의 이탈리아형제들(Fdl)이 가장 많은 이탈리아 국민의 표를 얻었다. Fdl은 유럽 의회에서 보수 정당인 유럽 보수와 개혁(ECR)에 속한다. 이번 선거에서 4석을 추가해 73석을 차지할 전망이다.

중앙으로? 먼 오른쪽으로?

연임 기로에 선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멜로니 총리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었다. 만약 멜로니 총리가 이 손을 잡는다면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연임은 가까워진다. 멜로니 총리 또한 극우 이미지를 희석할 수 있다. 반면 멜로니 총리와 손을 잡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국민연합(RN)의 실질적인 지도자, 마린 르펜이다.

프랑스 30퍼센트의 선택, 극우 정당

프랑스에서는 RN이 30퍼센트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의회 해산을 명령하고 조기 총선을 선언했다. 프랑스 국민의 재신임을 받아 국정 운영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르펜 입장에서는 아직 부족하다. 유럽 전체를 오른쪽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민족주의 기반의 세력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르펜의 생각이다. 이탈리아의 멜로니 총리는 더없이 좋은 파트너다. 이제, 멜로니 총리의 선택에 따라 유럽이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을 중심으로 움직일지, 극우 정당의 영향력에 흔들릴지가 결정된다.

IT MATTERS

선거는 끝났지만, 실은 끝나지 않았다. 각국의 정당이 모여 유럽 의회의 정치 그룹을 구성하는 특성상 합종연횡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합종연횡은 무대 뒤에서 펼쳐지는 그들만의 담합이 아니다. ‘정치그룹 결성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인 정치 일정에 포함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멜라니 총리의 선택은 지금까지의 유럽을 지울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유럽이 공식적으로 산업을 환경보다 선순위로 놓는 정책을 시작할 수도 있다. 오는 11월 치러질 미국 대선의 결과와 맞물린다면 우리는 탈탄소를 이야기했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는 시나리오도 고려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면서 러시아가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할 수도 있다. 외교적 예의보다 패권의 힘이 더 중요한 시대가 다시 도래하게 된다. 한국 입장에서 유리한 환경은 아니다. 유럽이 변화를 맞고 있다. 이 변화는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우리에도 불어올 변화다. 유럽의 정치는 우리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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