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_ 구스타보 페트로
좌파 연합 ‘역사적 조약’의 구스타보 페트로가 콜롬비아의 첫 좌파 대통령이 됐다. 그의 이력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좌익 게릴라 단체 ‘M19’ 활동 경험이다. M19가 민주동맹 정당으로 전환되며 정계에 입문한 페트로는 상·하원 의원,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 시장을 지냈다. 하지만 우파 역사가 깊은 나라에서 게릴라 출신이란 꼬리표는 그를 따라다녔다. 2010년과 2018년 대권에 도전했으나 녹록지 않았다.
BACKGROUND_ ‘좌우’ 아닌 ‘변화’
콜롬비아는 중남미의 대표적인 친미 우파 국가다. 역사상 게릴라 반군 출신, 좌파 대통령은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최악의 상황 속 열린 대선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변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사상 최초로 우파 후보가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빈곤률 40퍼센트, 실업률 11퍼센트라는 먹고 살기 힘든 현실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진 두케 정권의 증세 계획은 기득권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콜롬비아 국민들은 우파 세력을 ‘항상 같은 사람들(los mismos de siempre)’이라 부르며, 그 반대편에 섰다. ‘항상 같은’ 현실에 대한 변화를 촉구했다. 콜롬비아 첫 좌파 대통령 탄생은 국민들이 변화를 택한 결과였다.
STRATEGY_ 먹고사니즘
페트로는 선거 운동 내내 ‘변화’를 외쳤다. 민생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빈부격차, 불평등에 지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이데올로기는 중요치 않았다.
ANALYSIS_ 뉴 핑크타이드
먹고 살기에 지친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변화를 택하고 있다. 페트로 당선을 기점으로 제2의 핑크타이드가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일었던 좌파 물결과는 차이점이 있다.
RISK_ 미국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도 핑크타이드 간의 연대는 미국으로서 탐탁지 않다. 미국의 중요한 우방국이었던 콜롬비아의 변화는 미국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민생 문제를 이유로 지지율 부진을 겪고 있는 바이든 정부에게 특히 그렇다.
KEYPLAYER_ 중국
중국은 중남미에서 미국의 빈자리를 파고들고 있다. 멕시코를 제외하면 무역면에서 중국은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 또 중국은 코로나19 상황에서 ‘백신 외교’에 나섰다. 중국은 중남미 국가에 시노백을 공급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인프라 투자도 적극적이다. 콜롬비아 보고타 지하철 건설 사업엔 중국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중남미는 미중 패권 경쟁의 새로운 장소가 되었다. 경제에 힘을 쏟고 있는 바이든은 중남미 국가들과의 관계 회복에 나섰다. ‘경제 번영을 위한 미주 파트너십(APEP)’를 구상했다.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의 중남미판 격이다. 하지만 관세 인하 등의 내용이 없어 여전히 ‘빈손’으로 접근한다는 지적이 있다. 미국이 멀어진 사이, 중국이 물량 공세를 하며 중남미와 새로운 이해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CONFLICT_ 자원 내셔널리즘
페트로는 여전히 미국에 대화의 장을 열어놓고 있다. 뉴 핑크타이드가 과거의 것과는 선을 긋고 있다는 점 또한 미국으로선 다행스럽다. 과거 핑크타이드는 자원 내셔널리즘을 내세워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을 가중시켰다. 뉴 핑크타이드는 자원 중심의 한계에서 벗어나 녹색 성장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한 문제가 남아있다. 자원부국에게 자원이란 여전히 극복하기 힘든 유혹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심화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석유, 구리, 리튬 등 온갖 자원이 풍부한 중남미가 기회를 쥔 상황이다. 자원 내셔널리즘의 유혹에 빠지기 쉬워졌다.
RECIPE_ 좌익 내셔널리즘?
민생에 기댄 지도자는 자국 이익 찾기에 집중하게 된다. 자원 내셔널리즘이 아니라도 방법은 있다. 자국 우선주의적인 태도는 우파만의 것이 아니다. 좌파에도 비슷한 흐름이 있다. 바로 좌익 내셔널리즘이다. 실제로 페트로 당선자는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후변화 정책, 아마존 보호 등에 관한 에너지 전환 회의를 제안하는 한편, 자국 에너지 보호에 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페트로는 수락 연설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아마존 열대우림에 흡수되고 있는 온실가스의 배출에 대해 미국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왔다”고 밝혔다. 민생에 골몰한 지도자는 밖을 보지 않는다. 콜롬비아는 자국 에너지 보호를 내세워 안을 다지고 있다.
REFERENCE_ 장 뤽 멜랑숑
실제 프랑스에서는 좌익 내셔널리즘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겨우 재선에 성공했지만, 두 달 만에 의회 주도권을 뺏겼다. 마크롱이 이끄는 중도 르네상스당을 포함한 ‘앙상블’은 하원에서 과반 의석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와중에 ‘뉘프(NUPES)’가 131석을 차지해 제1 야당이 됐다. 뉘프는 극좌 성향의 장 뤽 멜랑숑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대표가 이끄는 좌파 연합이다. 이 배경에도 ‘먹고 사는’ 문제가 있다. 마크롱이 자국 민생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심을 뒀다는 거다. 그 사이 멜랑숑은 불평등 위기, 금융 통제와 부의 재분배, 복지 확대, 공공 주도 에너지 전환을 말했다. 페트로의 공약도 유사한 지점에 놓여 있다. 좌익 내셔널리즘은 쉽게 민생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INSIGHT_ 자국으로 소환된 지도자
먹고 사는 게 어렵지 않았던 적은 없다만, 코로나 판데믹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더해졌다. 전 세계인은 매일 아침 신문을 통해 각국의 언어로 ‘먹고 살기 어렵다’는 현실을 확인하고 있다. 40년 만에 최악이라는 인플레이션 앞에 미국도 프랑스도 헤매고 있다. 먹고사니즘은 지도자들을 자국으로 소환했다. 자국의 민생만으로 벅찬 상황에서 글로벌 리더십이 부재하는 지-제로(G-0)가 계속되고 있다.
FORESIGHT_ 정해진 답
그럴 수록 국내 리더십이 중요해진다. 국제적으로 민생 재정비에 나설 때인 것이다. ‘런치플레이션’이란 단어는 당장 우리나라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먹고 사는 게 어느 때보다 간절한 아젠다가 됐다. 전 세계 지도자가 각국으로 돌아가 민생 돌보기에 골몰하는 동안, 우리나라에선 민생 정치가 실종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국회는 원 구성을 두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민생 뒤에 볼모라는 단어를 주고받는다. 전 세계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는 좌우를 떠났다. 안주할 것이냐 변화할 것이냐 묻고 있다. 그리고 답은 늘 정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