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청춘들도, 전태일과 함께 싸웠던 청춘들도, 전태일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이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청춘들도 이제 70대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노인 빈곤 위험도가 OECD
1위인 국가입니다. 젊어서 빈곤했던 이들은 아직 빈곤의 바닥에 가라앉아
폐지를 줍고 급식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동시에 우리는 대표적인 ‘부자세’로 꼽히는 종합부동산세를 이야기할 때 늘
70대를 언급합니다. 중산층으로의 사다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 그들은 서울 시내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그 자산이 급등하면서 신분 상승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은퇴해 소득이 중단된 그들에게 종부세를 부과하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정책은 휘청이기를 거듭합니다.
우리는 70대를 도대체 어떤 ‘세대’로 명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이런 질문에 도달하게 된 까닭은 최근 들어 자꾸만 ‘MZ세대’라는 단어와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절친한 선배와 정치적 논쟁을 할 때도, 편의점에서 포켓몬빵이 없다는 안내문을 보며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도, 북저널리즘에서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어가기 위해 소통하는 과정에도 MZ세대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쉽게 이야기하는 MZ세대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요?
MZ? 그저, X가 아닌 자들
MZ세대는 198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그 이후 세대인 Z세대를 아울러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가 어떻게 탄생하고 대중화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오늘은 접어두기로 하겠습니다. 이 용어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지만 이야기해 보기로 하죠. 언론과 출판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플랫폼에서 우리는 MZ세대론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콘텐츠의 주 소비층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MZ세대 당사자는 아닙니다. 40대 후반에서 50대에 접어들어 이제 회사에서 주요 관리직을 맡기 시작한 X세대들이, 사회 지도층이나 임원이 되기 시작한 N86세대들이 MZ세대론을 소비합니다. 이들이 후배들을 향해 ‘너희는 왜 우리와 다른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M세대와 Z세대를 하나로 묶는 것부터가 오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M세대는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성장과 번영을 보았지만, IMF로 부모 세대가 어떤 절망을 겪었는지도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계급의 몰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 간접적으로 어렴풋이 알게 된 후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월드컵은 축제였고 2008년의 촛불 시위를 통해 평화로운 시민의 자부심을 획득했으며 이 경험이 정치적 성향을 만들어냈습니다. Z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인 동시에 저성장 네이티브입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경기가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지만, 계급의 사다리는 이미 치워진 다음에 사회로 나왔습니다. 어른들이 꾸며 놓은 꿈과 희망은 대체로 거짓이라는 것을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여과 없이 보고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국가를 인식한 첫 사건은 세월호였고 2016년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지만 이후 정치적 행보는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M과 Z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있습니다. 이 두 세대의 가치와 생각이 같을 수 없습니다. MZ세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말입니다. 마케팅의 관점으로 접근하든, 정치적 효용을 위해 들여다보든 MZ는 효능이 전혀 없는 용어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MZ세대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M과 Z가 동일 집단으로 묶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X세대와, N86세대와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M도 Z도 그저 ‘타자’일 뿐입니다. 특히 직장에서 그렇습니다. 지시를 내려 일을 하도록 만들어야 할 사람들인데 이들이 예상밖의 말을 쏟아냅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퇴사를 통보합니다. 왜 나에게 당연한 것이 이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지 답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부터 잘못됐습니다. M과 Z는 전혀 다른 세대입니다.
그렇다면 M과 Z를 분리하면 무언가 답이 나올까요? 안타깝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시대정신을 공유합니다. 때문에 세대가 하나의 인격체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개인은 그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각기 다른 철학을 키우고,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체로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각자가 속한 계급입니다. 우리 사회가 소유하고 있는 부의 절댓값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는 너와 내가 비슷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워졌습니다. 당장 밥을 굶지 않고 멀쩡히 옷을 입고 있으니 가시적인 부분에서는 빈곤이 두드러져 보일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M도 Z도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성장했으며 개인이 겪는 ‘경제적 몰락’은 그 빈도도, 잔인함도 증가했습니다. 노력의 효율은 떨어지고, 계급 간 격차는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M도 Z도 각자가 속한 계급에 따라 성향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입니다.
세대 말고 시대
그래서 M이든 Z든 이해하고 싶다면 세대가 아니라 시대를 먼저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 안에서 각자의 계급이 어떤 결정을 하도록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요? 많은 키워드가 있겠지만, ‘팬데믹’이야 말로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던 이 시대의 스토리입니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역사는 최근 2~3년을 ‘재난의 시대’로 기록할 것입니다. 코로나19는 불평등한 재난이었습니다. 재난의 시대에는 직장을 잃은 사람도 있고, 거리두기 정책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이 시대를 기회로 삼아 호황을 누린 업종도 있습니다. 자산 가격 폭등으로 순식간에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죠. OECD 주요 국가와 비교해 보면, 한국은 팬데믹 시대에 자원을 재분배하는 일에는 굉장히 소극적인 국가였습니다.
기회가 희박했던 사람들은 기회의 진공상태에 갇혔습니다. 기회 앞에 망설였던 사람들은 쏟아지는 기회 앞에 이걸 잡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죠. 그 비일상은 곧 끝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시기가 남기고 간 것이 무언인지 되물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서 살아남은 각 세대는 어떤 경험과 철학을 안고 사회를 이루어 나가게 될 것인지를 가늠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M과 Z는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생산활동을 해야 할 시기에 코로나19를 만났습니다. 이미 직장을 갖고 있던 M은 종사하고 있던 직종에 따라 운명이 갈렸습니다. 여행업 등에 종사했던 M은 직장을 잃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월급 생활자로 살아가면서 경제적 타격에서는 비켜섰습니다. 자영업에 뛰어들었던 M 중에는 직격탄을 맞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버틸 만큼 자산을 갖고 있던 M은 버텼고, 개중에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자산시장의 호황으로 계급 상승을 성취하기도 했죠. 그러나 한 켠에서는 속절없이 몰락했습니다. 2년 반이 지난 지금, 남은 것은 정부 지원으로 받은 저리 대출뿐입니다.
Z는 생산 활동 현장으로의 진입 자체를 거부당했습니다. 채용이 급격히 줄면서 취업 자체가 힘들어진 것입니다. 취업에 성공해도 직장에서 미래를 발견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회사는 신입답게 몸과 마음을 갈아 넣을 것을 요구하지만, 어차피 평생직장이란 것을 말로도 들어본 적 없는 Z입장에서는 황당한 요구일 뿐입니다. 결과는 높은 퇴사율로 나타납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로 인해 정부 지원금 등 글로벌 자산 시장에 돈이 거의 무제한으로 풀리면서 투자소득이 근로소득을 압도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투자를 할 수 있느냐에서 Z간의 계급 격차가 벌어지고, 투자에 성공했느냐에서 다시 한번 계급 격차는 공고해집니다.
그렇다면 Z에게 계급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꿈의 격차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태어난 이들은 그 이전 세대와는 달리 세상을 희망의 필터 없이 보고, 듣고, 경험하며 자랐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이란 명제가 시대를 거쳐 어떻게 변화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 언젠가는 가난을 두고 ‘가난한 사랑노래’를 읊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가난은 떨어지면 비참함을 면할 길이 없는 공포의 수렁이며 만약 내가 그 가난 속에 있다면 웬만해선 평생토록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는 것을, 보통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체득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N포 세대’를 서글프게 이야기합니다. 감상적이고 안쓰러운 시선으로 다룹니다. 그러나 어떤 Z에게 이것은 당연한 현실일 뿐입니다. 당사자는 이미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지금 당장, 이 순간 생존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