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레사는 지난 12월 10일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어렵게 참석했습니다. 두테르테 정부는 마리아 레사의 노벨평화상 시상식 참여를 조직적으로 방해했습니다. 현재 마리아 레사는 6년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보석으로 겨우 석방된 상태입니다. 필리핀 법무부는 마리아 레사가 도주와 망명 우려가 있다면서 출국을 금지했습니다. 마리아 레사는 필리핀 태생의 미국 이민자입니다. 열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죠. 두테르테 정권이 레플러가 미국 언론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죠. 마리아 레사의 동생은 지금도 미국에 사는 미국인입니다. 마리아 레사는 모국 필리핀을 선택했습니다. 마르코스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시작한 필리핀에서 희망을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필리핀 민주주의가 포퓰리스트 정치인 두테르테한테 현혹돼 합법적으로 권력을 넘겨주는 걸 보면서 절망을 봤습니다. 그래도 필리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필리핀으로 돌아오면 체포될 걸 뻔히 알면서도 반드시 돌아왔죠. 저널리즘이 필리핀 민주주의의 희미한 희망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레사가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여했다가 도망칠 거란 두테르테 정권의 주장은 방해를 넘어 음해입니다.
두테르테 정권은 국제 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12월 8일부터 13일까지 단 6일 동안만 오슬로 방문을 허락했습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저널리스트가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례는 1936년 독일이 거의 유일합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 저널리스트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강제수용소에 감금된 탓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2년 뒤인 1938년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필리핀 두테르테 정권은 나치 히틀러 정권 수준인 겁니다.
진짜 문제는 괴벨스의 노골적인 선전선동술에 의존했던 히틀러 정권과 달리 두테르테 정권은 은밀한 소셜 미디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서 저널리즘을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저널리즘의 앞이 아니라 등을 노리는 셈입니다. 지난 12월 10일 노벨상 시상식에서도 마리아 레사는 수상 소감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저널리즘과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는 소셜미디어 빅테크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필리핀에선 “모든 저널리스트는 썩었다”는 주장이 소셜미디어에서 판을 칩니다. 저널리즘과 독자의 사이를 갈라놓는 주장이죠. 래플러는 이런 주장들이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오는지를 추적했습니다. 소수의 블로거나 인플루언서들이 수백만 명과 소셜 네트워킹을 이루면서 대중의 여론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사람은 사실이 아니라 사람을 믿습니다. 사람의 본능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유인원이던 시절부터 무리의 여론을 믿고 동태를 따라야 생존에 유리했던 탓인지도 모릅니다. 저널리즘에 등장하는 사실과 정보와 분석과 통찰과 전망들은 우리의 본능에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보고 믿던 정보들과 다를 수 있으니까요. SNS는 저널리즘과는 정반대입니다. 친구들이 믿고 보는 걸 우리도 믿고 보게 해주니까요. 만일 SNS가 포퓰리스트 정치인에 의해 악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포퓰리스트는 쉴 새 없이 국민을 찾는 대중영합형 정치인입니다. 권력은 인기에서 나온다는 걸 아니까요. 그래서 포퓰리즘과 SNS의 결합은 악몽입니다.
포퓰리스트는 SNS를 활용해서 자신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자신에 반대하는 정치인을 미워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인을 증오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직접 손도 안 대고 말입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포퓰리즘이 봉사하게 만드는 것이죠. 지금 필리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마리아 레사는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SNS를 민주주의의 독극물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페이스북이야말로 글로벌 지식정보 시스템의 적이라고 규정합니다. “페이스북은 사람들이 사실을 거부하고 저널리스트를 오해하게 만든다. 우리를 설계하고 분열시키고 극단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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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는 프린스턴 대학교 정치학과 얀 베르너 뮐러 교수가 쓴 책입니다. 뮐러 교수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공통점으로 반엘리트주의와 편가르기를 꼽습니다. 반엘리트주의의 대표적인 통치 기법이 안티저널리즘입니다. 두테르테 정권이 “모든 저널리스트는 썩었다”는 독극물을 소셜네트워크에서 끊임없이 퍼트리는 게 대표적입니다. 부패한 언론도 있습니다. 비겁한 언론도 있습니다. 두테르테 정권의 진짜 목적은 대중이 부패한 언론이든 성실한 언론이든 모든 언론을 모조리 불신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야 두테르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니까요. 두테르테의 편가르기는 마약과의 전쟁입니다. 마약과의 전쟁은 필리핀 사회를 갈가리 찢어놨습니다. 2016년 두테르테 집권 이후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마약범으로 몰려서 재판도 없이 길거리에서 사살당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마약 조직의 일원이었는지는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