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가 돌아옵니다. 2018년 S/S 콜렉션을 사실상 마지막으로 셀린을 떠났고 패션계를 떠났던 슈퍼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가 런웨이로 돌아옵니다. 왕의 귀환입니다. 3년 만입니다. 벌써부터 글로벌 패션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피비 파일로의 귀환은 복수의 해외 언론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피비 파일로가 그녀의 개인 브랜드로 패션계로 돌아온다”라며 소식을 전했습니다. 《비즈니스 오브 패션》의 보도는 약간 더 해상도가 높았습니다. “LVMH의 일부 지원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복귀할 계획”이라고 보도했죠. 외신을 종합해 보면, 피비 파일로의 새 브랜드 이름은 피비의 이름을 따게 될 듯합니다. 이건 어느 정도는 예상됐던 일입니다. 피비 파일로와 같은 영국 출신이었고 같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 출신이었던 알렉산더 맥퀸 역시 LVMH에서 지방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한 다음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했죠. 지금도 우리가 애정하는 알렉산더 맥퀸입니다. 럭셔리 하우스의 수장으로 명성을 쌓은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패션 브랜드화하는 건 가장 우아한 피날레입니다.
그동안 피비가 알라이아나 샤넬의 수장을 맡을 거란 얘기도 많았습니다. 알라이아는 창시자 아제진 알라이아가 타계한 뒤로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상태였죠. 샤넬 역시 전설적인 칼 라거펠트의 공백을 30년 동안 라커펠트의 오른팔이었던 버지니 비아르가 채우고 있죠. 알라리아와 샤넬의 공백을 채우는 건 피비 입장에선 셀린에서 이미 성공적으로 해냈던 도전 과제입니다. 그보단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성공시켜서 아르마니나 프라다나 생로랑 같은 패션계의 여러 전설들과 동등한 반열에 오르는 것이 더 도전적이고도 매력적인 길입니다.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인 피비 파일로한텐 훨씬 더 피비다운 걸음이죠.
또 셀린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럭셔리 제국 LVMH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 고리가 만들어질 듯합니다. 피비가 패션계를 떠난 3년 동안 LVMH의 아르노 회장이 어떻게든 피비를 복귀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피비가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 걸 세상에서 가장 원통해했던 사람이 아르노 회장이라는 얘기도 있었죠. 피비가 어디에서 누굴 만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으니까요. 아르노는 피비가 경쟁사인 케어링 그룹과 손잡을까 봐 노심초사해 왔습니다. 디올과 루이비통에 이젠 티파니까지 거머쥔 LVMH는 강대한 럭셔리 제국입니다. 구찌를 앞세운 케어링 그룹의 추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절대적인 팬덤을 보유한 피비가 케어링과 손잡는다면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죠. LVMH가 피비 파일로의 새 브랜드에 투자한 건 피비를 묶어 놓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피비는 절대 적으로 만들면 안 되는 존재니까요.
일단 피비는 친환경성과 지속 가능성에서 자기 브랜드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코 프랜들리와 서스테이너블은 피비 파일로의 사생활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입니다. 셀린을 이끌던 시절에도 피비는 삶과 일을 완벽하게 분리했습니다. 피비의 사생활은 화려한 패션계와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한 남자와 결혼했고 세 아이를 뒀으며 영국 교외의 농장에서 자연과 벗하면서 아이들을 키웠죠. 셀린은 대표적인 파리 브랜드입니다. 피비는 셀린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런던으로 옮겼습니다. 일을 위해 가족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셀린 수장을 맡는 대신 피비가 내건 조건이었죠. 피비는 셀린 이전엔 끌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습니다. 끌로에를 성공시켰지만 출산을 하면서 육아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로 브랜드를 떠나버렸죠.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을 접은게 아닙니다. 본인이 아이를 직접 키우고 싶어서 일을 정리한 것이죠. 피비한텐 일보다 언제나 가정이 우선입니다. 피비의 패션이 아무리 화려해보여도 그녀의 본질은 담백합니다. 피비의 이름을 딴 브랜드라면 당연히 피비의 삶이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브랜드의 특징이죠. 디자이너의 삶이 곧 브랜드의 정체성인 것이니까요. 피비의 새 브랜드가 친환경성과 지속 가능성을 정체성으로 삼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피비의 복귀 시기는 그녀가 셀린으로 돌아왔던 2010년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당시 세계 경제는 2008년 금융 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금융 위기는 패션 산업 전체를 위축시켰습니다.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위기는 언제나 변화의 기회입니다. 패션 산업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존 패션이 도태되고 새로운 패션이 등장하는 최적기죠. 경제 위기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바꿔 놓기 때문입니다. 이때 여성 패션 시장의 중심에 새로운 소비 계층이 등장합니다. 자기 커리어를 개척해 나가는 유능한 멋진 여성들이었죠. 이들은 단단한 소비력으로 무장했고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패션 브랜드에 아낌없이 돈을 쓸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피비의 셀린은 멋진 젠틀 우먼들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패션이었습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신사복을 차려입는 월스트리트 남성들한텐 위기였지만 셀린을 즐겨 입는 유능한 커리어 우먼들한텐 기회였습니다. 지금도 경제 위기 상황입니다. 판데믹은 다시 한 번 패션 시장의 판을 흔들고 있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분명 새로운 여성 패션 소비자가 등장할 공산이 큽니다. 피비의 뉴 브랜드가 어떤 모습이든 그들을 겨냥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을 겨냥해야 할 겁니다. 피비도 그걸 모르지 않겠죠.
피비는 안티 디지털로 유명합니다. 인스타그램도 유튜브도 없습니다. 피비 시절 이른바 올드 셀린의 인스타그램은 늘 패션계의 화제였습니다. 너무 못해서요. 에디 슬리먼이 이끄는 뉴 셀린의 인스타그램이 화려한 볼거리로 그득한 것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입니다. 사실 피비와 에디는 인스타그램만 대조적인 게 아닙니다. 패션의 세계관 자체가 다르죠. 에디가 늘 젊음을 집착한다면 피비는 자연스러움을 지향합니다. 에디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패션을 원한다면 피비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패션을 제시하죠. 본질적으로 나를 타인에게 보여 주고 드러내는 게 목적인 인스타그램은 피비와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문제는 시대의 트렌드입니다. 인스타그램이든 틱톡이든 디지털 소통은 패션의 본질이 됐습니다. 당대의 소비자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코로나 이후 패션 소비의 메인 플랫폼은 이커머스로 전환된 상태입니다. 셀린 시절 피비는 우아하고 세련된 오프라인 플래그쉽 스토어로도 유명했습니다. 셀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피비는 전 세계 셀린 매장 바닥의 대리석 바닥까지도 직접 골랐죠. 소비자들에게 완벽한 경험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죠. 구찌는 메타버스에서 소비자들과 소통합니다. 온라인은 더 이상 오프라인의 대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오프라인이 온라인의 대체재죠. 그게 메타버스 2.0 시대입니다. 피비가 적응해야만 하는 시대죠. 과연 피비가 디지털 시대에도 피비일 수 있을까요. 패션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MZ세대는 과연 피비의 브랜드에 2010년대의 패션 소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열광할까요. 바꿔 말하면 피비가 2020년대의 새로운 소비자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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